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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욱 칼럼] 우리 시대의 ‘고디바’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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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1. 13. 17:51

이경욱대기자-웹용
아시아투데이 대기자
유명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는 영문은 Godiva로, 영어 발음으로는 고다이바라고 한다. 벨기에 초콜릿 회사로 탄생한 뒤 전 세계로 확산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아 곳곳에 매장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화가 고디바에 담겨져 있다. 초콜릿 브랜드 명성보다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다. 영국 코번트리 지방에는 '고디바'라는 이름의 귀족 부인 전설이 내려온다고 전해진다.

고디바는 11세기 그 지방 영주인 백작 리어프릭의 부인이었다. 결혼 당시 리어프릭은 65세의 늙은이였고, 고디바는 16세의 꽃다운 처녀였다. 백작은 다른 영주들과 다름없이 관할 농민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착취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였던 고디바는 남편의 가렴주구(苛斂誅求) 탓에 극심한 생활고를 겪다가 끝내 목숨을 끊는 농민들이 늘어나자 남편에게 무거운 세금 부담을 줄여달라고 날마다 간청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주는 아내의 청을 철저히 무시했다. 고디바가 포기하지 않자 "나체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 경우 농민 세금을 감면해 주겠다"는 결코 실행에 옮기기 힘든 제안을 하게 된다. 영주는 신분 높고 신앙심 깊은 부인이 귀족 신분에 알몸으로 거리를 돌아다닐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제안을 했겠다. 하지만 고디바는 자신의 체면보다는 농민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희생을 결심한다. 알몸으로 거리를 돌아다니기로 마음을 먹기에 이르렀다.

날이 밝자 고디바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머리카락으로 몸을 일부 가린 채 말을 타고 영지를 돌아다녔다. 그의 이런 결심은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 영지에 널리 퍼졌다. 농민들은 그의 거룩한 뜻을 알고 알몸을 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고 커튼을 내렸다. 고디바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말을 타고 동네를 돌아다녔을까. 백작은 고디바의 의로운 행동에 감화돼 세금을 감해주는 등 선정(善政)을 폈다. 농민들은 고디바의 희생정신에 감동해 그를 추앙하게 됐다. 그의 말 탄 모습은 1897년 영국 화가 존 콜리어가 그려냈다.

2025년 1월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고디바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와 사회에 지금 과연 고디바 같은 인물이 과연 있겠느냐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지난해 말 비상계엄이 전격적으로 선포되고 국회가 계엄 해제를 결의한 데 이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등 우리는 상상하기 힘든 격변의 시기 한가운데 침몰해 있다.

역사 속으로 한참 오래전 들어가 처박혀 있던 계엄이 대명천지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수십 년 전 선포됐던 계엄은 세계 10위권 경제선진국으로 진입한 우리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폭풍이었다. 모두가 아파했고 두려워했다. 그 이후 총리도 탄핵소추 된 상황에서 경제부총리가 국정을 맡는 아슬아슬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다. 북한 핵문제 등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국내외 상황 속에서도 대한민국호(號)는 세월을 따라 그럭저럭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국민은 지금 이 상황을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여야가 대립하는 모습, 관저에서 머물고 있는 윤 대통령을 둘러싼 이야기, 대통령 관저 앞 한남동 일대를 뒤덮은 시위대, 윤 대통령 신병 처리를 둘러싼 경호처와 공수처·경찰의 대립 모습 등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때 아닌 혼돈의 시기를 혹독하게 지나고 있다. 살을 에는 듯 매서운 추위 속에 모두가 더 몸을 움츠리고 있다. 그사이 스탠더드앤푸어스(S&P)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이런 혼란이 장기화하면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소환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다. 만일 거대야당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줄탄핵을 밀어붙이고 예산을 제로로 삭감하는 등 국정을 마비시킬 정도로 폭주할 때 야당 안에 고디바 같은 인물이 있었더라면. 만일 대통령실이나 검찰, 경찰 행정부를 비롯해 대법원, 헌법재판소, 그리고 국회, 언론 등 우리 사회 곳곳에 불공정, 부당, 편견, 일탈행위 등이 똬리를 틀 때마다 고디바 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오로지 국익과 국민을 위해 간절히 진언(陳言)을 했더라면. 여러 곳에서 고디바 같은 인물의 진언에 따라 실천이 뒤따랐다면 지금의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가와 나라, 조직을 위해 아낌없는 간청을 하는 인물이 곳곳에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을 없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아랫사람의 진언이 타당하다고 판단될 때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결정권자의 냉철하고도 바른 마음가짐이 물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견이 쏟아지고 있고 극한 대립 국면이 이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우리 시대의 고디바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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